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80~90년대 한국의 여아 낙태 문제 (문단 편집) === [[1980년대]] 이전 === 한국은 전통적으로 농경 사회의 특성상 [[다산]]을 장려했고, 근대 이전 높은 영유아 사망율[* 이 때문이라도 많이 낳으려고 했다. 아기의 [[백일잔치]]와 [[돌잔치]] 풍습, 출산 후 늦은 [[출생신고]]도 여기에 기인한다.]과 부족한 [[피임]]법 등의 이유로 가능한 한 자식을 많이 두려고 했다.[* 당시 보통 가구 당 평균 자녀수는 6명 이상(영유아 사망 제외)이었고, 간혹 10명 이상도 있었다.] 그리고 이런 현상은 [[6.25 전쟁|한국전쟁]] 이후 [[베이비붐]] 시대까지 지속됐다. 그런데 1961년 [[박정희]] 정권이 들어선 이후 2년 뒤인 1963년 산아제한정책이 실행되기 시작하면서 서구의 의료 지원에서 비롯된 낙태가 효율적인 산아제한정책의 수단으로 활용되기 시작한다.[* [[박정희]]가 일부 합법화했다고 하나, 산아제한을 이유로 한 [[낙태]]는 당시에도 명백히 [[불법]]적이었다.] 그러나 1960년대 중반에는 성감별 기술은 존재하지 않았으며, 낙태 기술도 발달하지 않아 흡인식의 초기 [[낙태]]만이 산아 제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에 불과했다. 그래서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1980-90년대와 같이 여아가 대량 낙태 당해 발생하는 [[성비]]불균형은 일어나지 않았다.[* 자연적으로 출생 성비는 '남아 105:여아 100'이다. 이후 사고나 질병 등의 이유로 가임기에서 거의 1:1로 맞춰지고, 평균 수명 때문에 노년기에 [[여초]]화된다.] 196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[[남아선호사상]]이 아주 강고해지고, [[낙태]]도 10만 건 정도에서 20만 건 정도로 활성화 되었지만, 이 때까지만 해도 낙태할 여건이 되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. 결정적으로 성감별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[[아들]]을 낳기 위해서는 우선 낳고 봐야 했다. 태어난 [[딸]]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, 이 시기에는 딸을 보통 4명 이상 낳았다. 그래서 1969년까지만 해도 딸만 4~5명씩 낳고 막판에 아들 1명 낳는 식의 [[딸부잣집]]이 많았다. 하지만 남아 선호가 유독 강한 집들은 1980년까지 계속되기도 하였다. 하지만 1970년이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. 1970년, [[박정희]] 정권에서는 "둘만 낳자", "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 꼴을 못 면한다."라는 표어와 함께 산아 제한을 본격적으로 확산한다. 1970년대 중반(1975년)부터 영향이 시작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